디지털장의사

디지털 사망을 위한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

scino 2025. 8. 1. 07:59

디지털 유언을 블록체인에 등록 중인 남성의 옆모습

디지털 시대의 죽음은 새로운 기술적 해결책을 요구한다. 사망 후 온라인 계정 정리, 디지털 자산 분배, 개인정보 보호 등 복잡한 과제가 남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발생했고 또 다른 방향으로는 블록체인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블록체인은 위변조가 불가능한 기록성과 탈중앙화 특성을 바탕으로, 사망 이후의 디지털 처리 문제를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글에서는 블록체인이 디지털 사망 관리에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디지털 사망 시대, 기술이 감당해야 할 책임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남긴 것은 더 이상 유품만이 아니다. 수많은 온라인 계정, 클라우드 속 데이터, SNS에 남겨진 사진과 글, 각종 이메일, 심지어 암호화폐와 NFT까지.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동시에 그 흔적을 복잡하게 남겼다. 생전에는 편리했던 데이터가 죽음 이후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게 된 것이다. 이른바 '디지털 사망'이라는 개념은 단지 사용자의 계정 삭제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자산의 법적 상속, 사망자 정보의 안전한 보존 또는 삭제, 유언의 실행과정에서의 인증 문제 등 복합적인 이슈가 얽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전통적인 행정 시스템이나 법률 체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오히려 새로운 기술적 도구가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블록체인(Blockchain)이 떠오른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 기반의 분산 원장 기술로, 누구도 조작할 수 없는 투명한 기록과 스마트 계약 기능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활용하면 고인의 디지털 자산 분배, 계정 관리, 유언 실행 등의 절차를 더욱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생전에 설정해 둔 조건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되는 계약, 또는 사망 이후 계정 접근 권한의 자동 이전 같은 기능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블록체인은 디지털 사망 시대의 대안적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일부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은 사용자의 사망을 조건으로 특정 데이터나 자산을 지정된 수신자에게 이전하는 서비스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사망 이후 데이터 처리와 관련한 투명성, 책임성, 보안성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윤리적, 기술적, 법적 쟁점도 함께 발생하고 있어 이에 대한 논의 또한 필수적이다. 디지털 사망 문제는 단지 기술적 대응을 넘어, 죽음을 둘러싼 문화와 법률, 사회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과제이다. 따라서 블록체인을 그 해결책으로 검토하려면, 단순한 기술 도입 수준을 넘어, 그 구조와 기능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사망 관리의 구조와 사례

블록체인을 디지털 사망 관리에 적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이다. 이는 사용자가 생전에 특정 조건을 미리 설정해 두면, 그 조건이 충족될 경우 자동으로 명령을 실행하는 일종의 자동화된 디지털 계약이다. 예컨대 사용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의 디지털 자산이 미리 지정된 지갑 주소로 자동 이전되거나, 특정 계정이 폐쇄 또는 이관되는 명령이 실행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동화된 시스템은 상속 분쟁을 줄이고, 유족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효과적이다.

 

또 다른 방식은 '분산 저장과 인증'이다. 사망자의 개인정보, 디지털 유언, 자산 목록 등을 중앙 서버가 아닌 블록체인 네트워크 상에 암호화된 형태로 저장해두면, 어떤 조직이나 개인이 이를 임의로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사후 데이터 위조나 유언서 변조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또한 특정 이해관계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설정할 수 있어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도 우수하다. 실제 사례도 존재한다. 미국의 한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은 사용자의 사망 확인 정보를 정부 또는 공인기관으로부터 자동으로 수신받아, 그 시점을 기준으로 유언 집행을 개시하는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글로벌 프로젝트는 유족이 설정된 지갑 주소를 통해 고인의 암호화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블록체인 지갑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아직 법적 제도나 사회적 합의가 미비하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도 제기된다. 먼저 사망 확인 방식에 대한 신뢰성이다. 의료기관이나 행정기관의 사망 확인 정보를 어떻게 실시간으로 블록체인에 연동할 것인지, 그리고 그 정보가 정확한지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스마트 계약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 자동 실행이 오히려 고인의 의도와 다르게 작동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블록체인은 비가역적이다. 한 번 실행된 계약은 되돌릴 수 없다는 구조는 보안상 유리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처럼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가진다. 예를 들어, 고인이 유언을 변경하고자 할 때 이를 기술적으로 간단히 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기술적 진보가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동시에, 인간 중심 설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대목이다.

죽음을 위한 기술, 인간 중심의 설계가 필요하다

블록체인 기술은 디지털 사망 시대를 위한 가장 유력한 기술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투명하고 위조가 불가능한 특성, 자동 실행이 가능한 계약 시스템, 그리고 글로벌 환경에서도 적용 가능한 확장성은 모두 디지털 유산 처리의 복잡성을 줄이고, 사망 이후를 보다 정돈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순간, 단순한 효율성이나 기능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인의 의지가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되는가, 그리고 유족의 권리와 감정이 어떻게 존중되는가 하는 문제다.

 

블록체인은 기계적으로는 완벽할 수 있지만, 인간적 요소를 반영하기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기술을 디지털 사망 처리에 도입하려면, 기술자와 법률가, 심리학자, 윤리학자 등이 함께 참여하는 다학제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법적 기반도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블록체인 기반 유언이나 자산 분배가 공증 없이 효력을 가지려면, 각국의 민법이 이에 대한 해석과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아직은 기술이 앞서가고 있고, 법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머지않아 그 간극은 제도적 논의로 좁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은 소수 특권층만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블록체인을 이용한 디지털 사망 처리가 고비용 서비스가 되거나, 특정 기술 집단에 독점될 경우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는 결국 기술의 본래 목적과는 어긋나는 결과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기술적 과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대에 진입했다. 블록체인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 자체가 답이기보다는, 기술을 어떻게 사람을 위해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디지털 사망’이라는 개념은 인간 존재의 마지막을 다루는 것이며, 그만큼 기술은 섬세하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블록체인을 통해 죽음도 품격 있게 설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제 막 마주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