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상속인의 법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디지털 자산이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오늘날, 사망 후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온라인 계좌, SNS,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 구독 서비스 등 디지털 자산은 유형 자산 못지않게 중요해졌으며, 이에 따라 ‘디지털 상속인’이라는 새로운 개념도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상속인이란 사망자의 온라인 정보를 대신 정리하거나 계승하는 사람으로, 일부는 유언장에 지정되거나 플랫폼 설정을 통해 사전에 등록된다. 하지만 아직 법적 정의가 명확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디지털 상속인이 어떤 책임을 지고 어디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본 글에서는 디지털 상속인의 등장 배경과 역할,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법적·윤리적 한계에 대해 자세히 다룬다.
변화하는 상속 개념과 디지털 유산의 부상
과거 상속은 물리적 자산에 국한되었다. 부동산, 예금, 증권, 차량 등 눈에 보이고 가치가 명확한 자산이 주요 상속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모바일의 보편화는 인간의 자산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디지털 자산은 이제 재산 가치뿐 아니라 정체성, 사회적 관계, 창작물까지 포괄하며,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남겨지는 ‘디지털 흔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디지털 상속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고인의 이메일 계정에 남겨진 청구서, SNS 계정에 담긴 가족 사진, 클라우드에 저장된 저작물, 혹은 암호화폐 지갑에 담긴 재산 등은 고인의 사망과 함께 방치되거나 악용될 위험에 노출된다. 유족 입장에서도 디지털 자산은 단지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 고인의 삶이 담긴 유산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따라 여러 나라에서는 ‘디지털 상속인’의 개념을 제도권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럽연합(EU)에서는 데이터 이동권과 디지털 자산 상속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며, 미국 일부 주에서는 사용자가 사망 전에 디지털 상속인을 지명하거나, 자동 삭제 설정을 통해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한국도 최근 일부 플랫폼에서 '계정 위임', '디지털 유산 관리자' 등의 기능을 제공하며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법적 정의와 범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디지털 상속인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디지털 상속인의 역할과 법적 책임
디지털 상속인이란 사망자의 온라인 자산과 정보를 대신 정리하거나 계승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고인의 SNS 계정을 폐쇄하거나 기념 계정으로 전환하고, 이메일을 정리하며, 구독 서비스를 해지하거나 저작권 있는 자료를 정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암호화폐 지갑의 복구나 전자문서 관리 등 고급 기술적 개입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역할이 대부분 비공식적이라는 데 있다. 현실에서는 가족 중 누군가가 고인의 기기를 열어 임의로 계정에 접근하거나, 고객센터를 통해 사망 증빙 자료를 제출한 후 일방적으로 폐쇄 요청을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사생활 침해 논란은 물론, 법적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현재 한국의 민법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명확한 상속 규정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판단은 관습에 기반해 이루어지며, 일부 사례는 법원의 해석에 따라 갈린다. 특히 개인정보보호법과 저작권법의 해석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인의 이메일은 저작권법상 보호받는 창작물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개인정보를 포함할 수 있어 법적 접근이 복잡하다. 또한 디지털 자산의 특성상 접근성이 큰 문제로 작용한다. 암호화폐 지갑의 경우, 키 정보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 누구도 해당 자산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며, 클라우드에 저장된 문서나 사진 역시 패스워드 없이는 열람이 불가능하다. 일부 플랫폼은 사전 등록된 신뢰인만 접근을 허용하지만, 이를 모르는 유족은 결국 자산을 영영 잃게 되는 셈이다. 디지털 상속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전 위임이나 고인의 명시적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망 전 이를 준비하지 않으며, 플랫폼 역시 사망자 계정 처리에 대한 명확한 정책을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디지털 상속인은 모호한 책임 속에서 감정적, 법적 부담을 동시에 떠안는 경우가 발생한다.
디지털 상속의 제도화를 위한 과제
디지털 상속인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지털 자산에 대한 법적 정의부터 재정립되어야 한다. 기존 민법은 유형자산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디지털 파일이나 계정, 클라우드 저장소, 구독 서비스와 같은 무형 자산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법률 개정이 필요하며, 특히 데이터 접근 권한, 삭제 권한, 계정 이전 절차에 대한 구체적 조항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디지털 상속인의 역할과 권한 범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단순한 계정 삭제를 넘어, 고인의 유지를 해석하고 유족 간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의 역할까지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 지정 시스템과 공인 인증 절차가 필요하며, 플랫폼별로는 API 연동을 통해 상속인을 위한 자동화 처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개인 사용자에게도 생전 디지털 유언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고인의 의사가 명확히 문서화되어 있지 않으면, 유족 간 갈등이나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기 쉽다. 따라서 사망 전 본인의 디지털 자산 목록과 상속 계획을 정리하고, 이를 공증 받거나 신뢰할 수 있는 저장소에 등록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전체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디지털 자산은 단지 파일이나 계정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삶이 반영된 또 하나의 유산이다.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감정적·문화적 준비도 병행되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상속 시스템이 병행될 때 비로소 디지털 상속인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