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장의사

유언보다 디지털: 계정 상속의 새로운 기준

scino 2025. 8. 6. 07:35

디지털 계정 상속을 대비하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일러스트

사망 후 남겨진 디지털 자산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가 아닌 상속의 중요한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SNS, 이메일, 사진, 클라우드 문서, 코인 지갑까지, 온라인 계정에 담긴 데이터는 고인의 정체성과 유산을 동시에 반영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유산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생을 마감하며, 유족은 고인의 의사를 알 수 없는 채 혼란 속에서 계정 처리 문제를 떠안게 된다. 이제 유언장보다 먼저, 디지털 계정의 사후 처리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 본 글에서는 ‘디지털 계정 상속’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왜 필요한지, 어떤 기준과 시스템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그 사회적 의미에 대해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디지털 유산, 새로운 상속 자산으로 떠오르다

생전에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온라인 계정들은 단지 기능적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삶, 관계, 생각, 감정까지 모두 디지털 공간에 기록되며, 이는 물리적인 유산보다 더 생생한 흔적이 된다. 이메일에 담긴 비즈니스 기밀,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과 영상, SNS의 사적인 메시지, 그리고 암호화폐 지갑까지. 현대인은 살아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디지털 자산을 축적하고 있으며, 이는 사망 후 ‘남겨진 것’으로서 중요한 법적·감정적 문제를 야기한다. 문제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 디지털 자산의 사후 처리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유언장은 물리적 자산 위주로 작성되어 있으며, 온라인 계정이나 로그인 정보, 클라우드 접근 권한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유족은 고인의 이메일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중요한 계약서나 금융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고인의 사생활과도 직결된다는 점이다. 공개되지 않은 채 고인의 의지로 남겨진 사진, 기록, 문서 등이 유족의 손에 의해 무분별하게 노출되거나 삭제될 위험이 있으며, 이는 고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유언장 개념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디지털 자산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상속 기준과 문화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계정 상속의 법적 공백과 기술적 과제

계정 상속은 법률과 기술, 윤리의 접점에 위치한 복합적인 문제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디지털 계정이 상속 대상이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국가에서는 ‘디지털 자산’이 상속 대상에 포함된다는 판례가 존재하나, 구체적인 처리 절차나 유족의 권한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가장 큰 법적 공백은 사용자와 플랫폼 간 계약에서 발생한다. 대부분의 플랫폼 약관은 ‘개인 계정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망 이후에도 해당 계정을 원칙적으로 삭제하거나 제한된 기능의 추모 계정으로만 전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유족이 법적으로 상속받을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한계다. 기술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고인의 계정에 접근하려면 로그인 정보나 2단계 인증이 필요한데, 이를 확보하지 못한 유족은 사실상 계정 사용이 불가능하다. 설령 사망 증빙 서류를 제출하더라도, 플랫폼 측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기술적 장벽과 플랫폼 정책은 계정 상속의 현실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암호화폐, NFT와 같은 디지털 자산은 계정뿐 아니라 개인 키를 요구하는 고도의 보안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그 접근권한이 명확히 상속되지 않을 경우 자산 자체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되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금전적 손실과도 직결된다. 이 모든 문제는 하나로 수렴된다. ‘디지털 유언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이제는 종이 한 장의 유언장이 아닌, 계정별 처리 방식과 로그인 정보, 위임자 설정 등을 포함한 디지털 유산 관리 문서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고인의 의사를 명확히 반영하고, 유족과 플랫폼 간의 갈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유언장보다 앞선 디지털 설계

디지털 계정 상속은 단순히 법률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된 주제다. 고인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모든 삶의 흔적이 온라인으로 옮겨간 지금, 계정 하나의 처리 방식이 고인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남겨질 것인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제 유언보다 먼저, 디지털 유산 설계가 필요하다. 생전에 자신이 사용하는 플랫폼과 계정에 대한 정리를 해두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정보 공유 또는 위임을 해두는 것이 좋다. 이를 돕기 위한 전문 서비스나 디지털 유언장 플랫폼도 점차 등장하고 있으며, 그 수요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플랫폼 사업자 역시 이용자의 사후를 전제로 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사후 계정 설정’, ‘디지털 상속자 지정’ 등의 기능은 필수적인 기본 옵션이 되어야 하며, 사용자가 생전에 이를 설정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쉬운 인터페이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자, 이용자 권리 보호의 연장선이다. 국가 차원의 법적 정비도 시급하다. 디지털 자산을 상속 대상으로 명시하고, 플랫폼과 이용자 간의 계약 관계를 법적으로 규율함으로써, 사망 이후의 정보 처리를 제도적으로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나아가 교육과 캠페인을 통해 국민들이 디지털 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발적인 관리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유언장보다 먼저 해야 할 일, 그것은 디지털 삶의 정리다. 인간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지만, 디지털 흔적은 더 오래 남는다. 그 흔적을 어떻게 남길지, 누구에게 넘길지, 그리고 어떻게 사라지게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