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장의사의 윤리적 딜레마: 기술과 감정 사이에서
이제 우리의 정보는 모두 정보로 남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사망 후 고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보들이 남용되고 퍼져나가는 것을 막이 휘해 디지털 장의사라는 사망자의 온라인 흔적을 정리하는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감정을 대체할 수 없는 영역까지 침범할 때, 이 직업은 단순한 데이터 정리자의 역할을 넘어 윤리적 판단자라는 무게를 짊어진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장의사가 마주치는 현실 속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그들이 조율해야 할 기술과 감정의 경계선을 살펴본다.
디지털 장의사의 판단이 필요한 순간들
디지털 장의사가 수행하는 주요 업무는 고인의 소셜미디어 계정 삭제, 클라우드 자료 정리, 가상화폐 접근권한 해지, 이메일 폐기 등으로 구성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수많은 감정과 요청이 복잡하게 얽힌다. 예컨대 고인은 생전에 자신의 블로그를 삭제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유족은 그 블로그가 고인의 유일한 기록이기에 남기고 싶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디지털 장의사는 기술적으로 삭제는 가능하지만, 윤리적으로 어느 쪽의 권리를 우선시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마치 물리적 유품을 폐기하거나 보존할지를 가족과 조율하듯, 디지털 정보에도 ‘기억의 무게’가 실려 있기에 임의로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이처럼 디지털 장의사의 업무는 유족의 정서, 고인의 의지, 법적 요건 사이를 정교하게 균형 잡아야 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삭제와 보존,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갈등
디지털 자산을 단순히 지우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어떤 데이터는 유족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콘텐츠는 유언처럼 법적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타인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고인의 게시물이 정치적이거나 민감한 발언을 포함한 경우, 이를 보존할지 삭제할지에 대한 결정을 누가 내려야 하는가? 디지털 장의사가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따라 일방적으로 판단한다면 이는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유족의 판단만을 따를 경우, 고인의 자율성과 생전 의지에 반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장의사는 기술자이자 중재자로서, 고인의 사적 영역과 유족의 애도 과정을 동시에 고려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일부 서비스에서 ‘유예 삭제’ 기능을 도입해, 일정 기간 보존 후 자동 삭제되도록 하거나, 유족이 열람만 가능하고 공유는 제한하는 기능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갈등을 줄이기 위한 절충점이자 기술적 윤리의 구현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서와 알고리즘이 충돌할 때
문제는 기술이 점점 ‘결정’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AI 기반 디지털 장의사 시스템은 사용자의 생전 활동 패턴을 분석해 자동으로 계정을 비활성화하거나 유언을 실행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기술은 정서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컨대 사용자가 마지막 로그인 이후 90일이 지나면 사망으로 간주되어 데이터가 삭제되도록 설정해두었지만, 사실은 단순한 장기 해외 체류였던 경우,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챗봇을 통해 고인을 ‘대화 가능한 존재’로 남겨두는 기능이 애도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에게는 현실과의 경계가 흐려져 감정적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정서적 준비가 되지 않은 유족에게 이러한 기능은 부담으로 작용하며, 기술이 인간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러한 자동화 시스템을 사용할 때 반드시 가족의 수용 여부, 정서적 회복 단계, 사망자의 생전 의지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법적 기준과 윤리의 틈을 메우는 역할
디지털 장의사의 업무는 아직 명확한 법적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개인정보 보호법과 상속법 사이의 공백은 디지털 장의사에게 모호한 판단을 강요한다. 고인의 의사가 문서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정보는 보존하고 어떤 정보는 폐기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결단의 문제다. 이에 따라 디지털 장의사는 단지 ‘계정 정리 전문가’가 아닌, 죽음 이후의 정리를 함께 고민하는 상담자이자 설계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실제로 일부 기업에서는 법률 전문가, 상담가, 데이터 엔지니어가 팀을 이루어 유족에게 최적의 애도 설계를 제안하는 디지털 장의사 패키지를 운영 중이다. 이는 단순한 계정 정리를 넘어서, 사회 전체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앞으로 디지털 장의사의 판단은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윤리적 감수성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동시에 요구받게 될 것이다.
결론: 인간 중심 기술로 남을 것인가
디지털 장의사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사망 이후의 정보를 단순히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통해 남겨진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별을 경험할 수 있을지를 설계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감정과 기억은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디지털 장의사가 기술과 감정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애도의 방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직업은 앞으로도 수많은 윤리적 질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기술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디지털 장의사는 더욱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기억을 정리하는 직업’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