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장의사의 하루: 죽음 이후를 설계하는 일의 실제
디지털 장의사는 사망 이후 온라인 세계에 남겨진 흔적들을 정리하고, 고인의 의사와 유족의 요청 사이에서 섬세하게 균형을 맞추는 새로운 직업입니다. 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이다보니 뭔가 삭막할 것 같은데 실제는 어떠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이 글을 통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디지털 장의사가 필요한 기술 및 법률 설명이 아닌, 디지털 장의사의 하루 일과를 따라가며 그들이 실제로 어떤 감정적·윤리적 판단을 하며 일하는지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상상 속이 아닌 현실 속의 디지털 장의사, 그들의 일상은 결코 차가운 데이터 정리가 아니랍니다.
08:30, 사망 인증 시스템의 알림음으로 시작되는 하루
아침을 여는 것은 이메일도, 알람도 아닌, 사망 인증 시스템에서 전송된 자동 알림이다. ‘홍길동(가명)님, 사망 인증 완료. 계약번호 DGS-4321 처리 시작 요망.’ 이 알림은 디지털 장의사의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시 전용 대시보드에 접속하여 고인의 생전 등록 정보, 디지털 자산 목록, 사전 설정된 정리 방식(예: 자동 삭제, 계정 비공개 전환, 유언 영상 전송 등)을 확인한다. 하지만 기술적인 프로토콜만으로 일처리가 끝나지는 않는다. 유족과의 연락을 통해 감정적 수용 상태를 확인하고, 데이터 정리 시점의 조율이 필요한지 판단한다. 어떤 유족은 당장 SNS 계정을 닫아달라고 요청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조금만 더 열어두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매뉴얼로 대응할 수 없는 순간들이 하루를 감싼다.
11:00, 클라이언트의 디지털 흔적 정리
고인의 메신저 대화, 이메일, 클라우드 파일, 유튜브 계정, 블로그 글, 심지어 구독 중인 뉴스레터까지… 각종 플랫폼의 계정 정보를 검토하고 사전 지정된 방식에 따라 처리 절차에 착수한다. 예컨대 “카카오 계정은 완전 삭제, 인스타그램은 추모 계정 전환, 네이버 블로그는 가족에게 PDF 백업 후 폐쇄”처럼 구체적 요청이 분류되어 있다. 처리 과정에서 데이터가 유실되지 않도록 백업 서버에 보존하고, 민감한 정보는 암호화 기술로 잠금 처리한다. 이 모든 과정은 개인정보 보호법, 사후 자산처리 관련 국내외 규정을 숙지하고 따르는 ‘법적 판단’을 동반한다. 단순한 IT 기술자가 아닌, 생과 사의 경계에서 유족의 마음과 고인의 뜻을 동시에 헤아리는 나는 고인의 ‘조율자’가 되는 것이다.
14:00, 남겨진 사람들과의 감정 노동
오후는 주로 유족 상담과 유언 메시지 전송 검토에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영상 편지를 AI 음성으로 보정해 전달하거나, 미리 작성해둔 마지막 메시지를 지정된 친구에게 메일로 발송하는 작업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 표현 수위다. 누군가에게는 이 메시지가 위로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상처로 작용할 수 있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 미묘한 판단을 반복하며, 고인의 의도와 남은 사람들의 감정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죽음 이후에도 감정은 유효하다’는 것을 매 순간 실감하게 되며 매번 하는 일이지만 숙연한 마음이 든다.
17:30, 기술과 윤리의 경계 위에서 마무리되는 하루
마지막 업무는 데이터 삭제 인증서 발급과 그날 처리한 케이스의 윤리 점검 리포트 작성이다. 시스템상 모든 절차가 정확히 실행되었는지, 유족 응대에 실수가 없었는지, 감정적 충돌을 유발할만한 요소는 없었는지 정리한다. 그리고 업무 종료 전, 자주 사용하는 ‘디지털 장의사 윤리 가이드라인’을 다시 꺼내 읽는다. “디지털은 차갑지만, 사후의 세계는 여전히 따뜻해야 한다.” 이 문장을 한번 더 새겨보며 오늘 하루의 정리를 대신한다.
나는 ‘기록을 지우는 사람’이 아닌, ‘존재를 이해하는 사람’
디지털 장의사의 일은 단순한 정리나 삭제가 아니다. 고인의 흔적을 통해 그 존재를 이해하고, 남겨진 사람의 감정을 존중하며, 온라인상에서의 이별을 설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마지막 디지털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지만, 곧 보편적인 일상이 될 것이다. 기술과 사람 사이, 윤리와 법 사이에서 이 일을 감당하는 이들이 바로 디지털 장의사다. 이 직업은 더 이상 미래의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 정리하고 있다.